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 우리들의 눈과 귀에 타인의 언행이 거칠게 포착되면 가감 없이 내뱉는 말들이 있다. “짐승보다 못한 놈!” “화인 맞은 양심이네.” “회칠한 무덤이네.”라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저질스런 언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칼날이다. 천하에 소중하게 태어나 존중받고 살아야 할 존재들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말들로 도배된다는 것은 비극 중이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은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예수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말로 모든 존재들이 뒤틀린 마음으로 어긋난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단언했다. 어찌보면 잘못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잘못을 한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요, 병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인간관계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문제가 발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는데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무지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망치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모르기 때문에 불의 도시로 뛰어 들어가며, 모르기 때문에 정글 속 늪으로 돌진한다. 모르기 때문에 높은 마음을 장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모르기 때문에 욕망에 사로잡혀 많이 가지려는 것에 혈안이 된다. 영원에 비하면 세상이 얼마나 순간인데, 수억만 겁을 살 것처럼 재산축척에 몸과 마음과 충성을 다한다. 그 결과 진정 지키고 보호해야 할 영원한 마음의 성이 파괴되고 만다. 정체성의 실종이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게감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이다. 원래 인간은 세상 어디에서도, 세상 누구를 만나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해도 세상의 주인처럼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늘의 형상을 닮은 위대한 존재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확고부동한 정체성을 망각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롭고 화려하게 재조명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의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왜? 정체성의 실종이야말로 무지의 마차가 달려가는 멸망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정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두가 술에 취하고 마약에 취한 모습처럼 갈팡질팡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목이 터져라 말하고 소리쳐도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는 교만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결국 바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뇌를 장착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오토바이에 꽂혔던 조카가 있다. 가족을 속이면서까지 달리고 싶었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래도 그 광란의 질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리뼈가 조각나는 큰 사고를 맞닥뜨린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가족은 왜 조카의 최고 기쁨을 막으려 했으며, 조카는 왜 끝없는 질주를 계속해야 했는가? 한마디로 모르기 때문이다. 조카는 부모가 걱정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가족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수밖에 없었던 조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모르기 때문에 서로 간의 갈등과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고, 모르기 때문에 불화가 발생하게 된다. 알고 모르고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큰 공간이 제공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능고사를 치르는 학생들을 보라!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은 당당하다. 왜? 답을 알기 때문이다. 준비가 되지 못한 자들의 마음은 편할 리가 만무하다. 마음의 온갖 잡음들이 설쳐댄다. 이것저것에 붙들려 갈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풀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진리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이다. 지식의 마당은 차고 넘친다. 모두가 만물박사가 될 수 있는 자리가 펼쳐져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각인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존재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존재의 회복, 즉 정체성의 회복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된다. “너는 네가 누군지 아니?” 이 말은 "네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니?"라는 말이다. 주어진 삶 속에서 세상을 살리는 존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썩어져 가는 세상에 발을 담가 구정물을 더 발생케 하는 존재로 살 것인가? 세상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나를 아는 것에 올인하는 삶이다. 만물의 영장인 내가 하늘의 뜻 가운데 바로 서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정 존재의 회복이요, 자유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