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뒤척임 끝에 힘겹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깊은 숙면으로의 초대를 받은 지 꽤 오래된 터러 소리에 민감한 때였다. 그런 나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뉴스에 등장한 패널들의 흥분된 소리가 마치 전쟁터에서 쏘아대는 총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내용인 즉 이랬다. 요즘에 빅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가수 김호중'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사건 자체를 놓고만 해석한다면 무지의 소치요, 이기적인 욕망이 낳은 패륜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온 국민의 관심사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출연진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 아나운서들의 재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발하다. 어짜피 방송은 시청률 싸움인지라 이목을 끄는 언행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과 자신들은 마치 신이라도된 듯, 사건 속 주인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꼴사납기까지 했다.
"비판하지 말라" 요즘 온라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튜브'다. 가끔씩 빅 뉴스가 등장하여 찾아 들어가면 온갖 개인방송에서 쏟아내는 폭언은 도를 넘어간다. 더군다나 자신은 성직자라고 지칭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저미어 오곤 한다. 돈에 중독된 정신 나간 사람들의 횡포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의 실수를 온 천지에 도배한다. 한 번의 실수로 매장시키는 것은 한 순간이다. 실제로 깊은 우울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생명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지 않는가? 나는 되묻고 싶었다. "여보세요! 당신들이 정말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세요?" 자신들의 주장은 결국, 돈벌이 수단과 자신의 밥줄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아 버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패널들이나 유튜브들은 모두가 지식인들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 시청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말씀이 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데일카네기도 '인간관계론'에서 이렇게 역설하고 있다. "비난은 항상 되돌아온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잡아주려고 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것이고 도리어 우리를 비난할 것임을 명심하자!" 패널들이 그렇게 흥분하며 남의 잘못을 비판하지 않아도 온 국민이 다 이해하고 공감한다. 변호사요, 대학교수와 같이 지성인들인데도 그 비판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알고 있다면 과연 이런 무지의 언사를 난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내 눈에는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흥분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많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방송을 하면서 조금은 더 성숙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분석해 갈 수 있기를 바래어 본다.
모든 것에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 인생에 있어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은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자신이 먹을 것을 거두어들인 다는 것만큼 불변의 진리는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입술이다. 한 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입술에 무게를 두며 살아야 한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살고 죽는다. 그리고 천냥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는가? 타인의 문제와 사건에 시선을 빼앗긴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현주소를 모른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기에 타인의 아픔에 비판의 화살을 쏘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견해는 탁월해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문제와 사건은 단지 나를 더욱더 아름다운 존재로 빚어가는 귀한 도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은 잘못된 삶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잘못에 대한 심판은 하늘의 몫이고 당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의 들보가 볼 수 있는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자가 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