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맞추는 것에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권투선수는 상대방을 공격해서 급소를 맞추는 것에 탁월해야 하고,, 야구선수는 야구배트로 투수가 던지는 공을 맞추는 것에 탁월해야 레전드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요리사는 간을 잘 맞추는 것에 일가견이 있어야 하고, 이 시대의 핫이슈인 로또 당첨은 번호를 잘 끼워 맞춰야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께 초점을 잘 맞추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부관계도 그렇다. 각자 따로 놀던 금성과 화성이 만났다. 만나기는 만났어도 서로를 배려해 주는 차원에 다다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의 시간이 필요하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피가 터지게 싸우고, 만정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뼈아픈 시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가 갈리고 갈려 딱 맞아떨어질 때 고요함 속에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맞추는 것의 중요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들과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눈높이를 맞추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은 순조롭게 시작된다. 만약 아이의 눈높이가 아니라 내 눈높이에서 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쓴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바로 아이를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꾸짖음이다. 자녀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이들의 분노는 하나님의 칼이 되어 나를 공격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엡 6:4)
직장 생활은 또 어떤가? 선임은 신입의 마음에 초점을 먼저 맞추어야 한다. 어리둥절하는 신입의 마음에 자신의 조급함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입은 선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서로가 눈높이를 맞추어야 두 바퀴가 아름답게 굴러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둘 사이에 큰 소용돌이가 발생하게 되고, 그 파열음은 결국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키는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만족을 표출한다. 모든 존재가 이기주의의 소산물이기에 스스로 높은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를 않는다. 결코 현실에 맞추어 살려는 강한 의지의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현실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세상이 맞추어지기를 기다리는 철부지식 조율을 꿈꾸고 있는 것만 같아 아쉽다.
이런 헛된 망상의 존재들의 결과가 무엇인가? 고통이 주어지면 견디지를 못하고 가던 길에서 스스럼없이 발을 뺀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존재로 거대한 세상이 맞추어주기를 기다리는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맞추어 살 수 있는 낮은 마음을 장착한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과 그 환경에서 말이다.
모든 삶의 문제와 사건은 맞추어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문제다. 내 고집, 내 주장, 내 개념위주의 삶으로는 결코 세상에 맞추어 살 수가 없다.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스트레스의 온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도 친구도 동료도 내가 말없이 맞추어 살아낼 때,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니요 나를 더욱 아름다운 존재로 성장시키는 찬란한 도구가 된다.
거대한 바다는 어떠한 종류의 물이 난입을 해도 바다의 면모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더더욱 어떤 인연과의 만남에도 요동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헛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우리가 품지 못하고 맞추지 못할 대상은 없다. 그저 나를 덮친 모든 난관이 나를 돌아보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더욱 그렇다.
미국의 지적 독립의 선두주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생의 최대 행복은 자신이 찾아낸 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세상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라고 말했다.
어떠한 존재와도 맞추며 살 수 있는 존재로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 자신을 내려놓는 고통을 외면한 채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관계들을 보라!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아가다가도 한순간의 토라짐으로 빛을 잃어버린 에너지 고갈상태로 진입한다. 더 나아가 분열의 상태를 보여주고 결국 파멸의 수순을 밟게 된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표본은 단 하나다. 하늘영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쓰레기장과 같은 타락한 세상과도 맞출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하늘의 능력임을 입증해 보이셨다.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낮아지심이야말로 맞춤의 절대 정석이며, 윈윈(winwin)의 표본을 그대로 보여주신 절대적 사건이다.
이런 치욕과 수치를 당하시며 맞추는 삶을 친히 보여주신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타락한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거룩한 삶으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늘의 무한 영광은 무한 내려놓음과 일치한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 누구와도 맞출 수 있는 거대존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 안에 계신 예수의 표현이며,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는 삶의 현장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을 통하여 예수께 초점을 맞추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확실한 이유다. 우리의 성숙의 정도는 말이 아니라 이런 삶을 살아내는 정도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