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괭가리에 불과합니다.
모든 종교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라.'입니다. 그러나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으니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으로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사랑하라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일부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랑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깨닫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의 의식을 장착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과연 세상에 얼마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라' 이것은 율법의 울타리에서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차원에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생명적 존재는 자라는 것을 대명제로 합니다. 자라지 않는 것은 생명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율법이라는 안전장치가 없어도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효도를 하는 자녀들은 의식자체가 다릅니다. 효도의 대상인 부모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효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면 진정한 효도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겸비해야 진정으로 영향력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라'의 차원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차원은 인연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아이와 성숙한 어른의 차원이며, 율법과 진리의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식 차원에 머물러야 '사랑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인연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붙이면 고통스러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텐데, 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붙여서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그러면서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시는 것이 하늘의 비밀입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분이 왜 원수같은 사람과의 인연을 주관하실까요? 이것이 해독되지 않고서는 결코 인연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헤어져 버리는 것도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높은 차원의 사랑은 성경속 '사도바울'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중심의 극치를 달리던 지성인이면서 이기적인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멸시하고 살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던 바울이 자신의 몸을 바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최후의 고백을 합니다.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기 전 사도바울의 삶을 보십시오.태창으로 맞고, 이유 없이 감옥에 가고, 40명의 로마군병이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칼을 들이대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존재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성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었을 거라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감금하는 인연들에 의해 내 안의 자아가 박살 나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모든 방송매체에서부터 공연이 이르기까지 그리고 모든 관계의 표현은 사랑을 전함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말로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전달은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다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쉽기 때문입니다. 힘든 노동이나 물질적인 손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행함과 진실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본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심으로 사랑을 시작하셨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세뇌를 시키는 어린 차원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은 오랜 시간 고통의 늪에서 빚어진 명품들만이 할 수 있는 삶의 차원입니다. 이제는 '사랑하라'라는 말과 혀로만 행하는 우리들이 아니라, 신과의 온전한 관계회복을 통해 나 자신이 스스로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식차원에 거하는 존재들이야말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럴 자격을 가진 존귀한 존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