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은 살지 좋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우스갯말로 여자들의 편한 세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전에 하던 일들을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접어들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삶의 영역이 전자제품의 몫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는 로봇의 상용화로 이어진다면 이런 추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내면에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겁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하나로 다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되는 중독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은 어떻게 될까요?
무엇인가 의지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약하다는 것이며,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문제로 떠 오르는 어딘가에 중독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에 어릴 적 부모를 의지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의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면 어떠한 상황에 놓여도 스스로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자생력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어쩌지? 이것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데!라는 소심한 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매달리는 태도는 원래 인간이 가진 강하고 담대한 형상에서 정도를 이탈했다는 확증입니다.
원래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바 되었습니다. 성경에 온전하라, 완전하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원래 인간이 온전한 존재였음을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왜 온전했던 인간이 의지하고 중독된 나약한 존재로 추락해 버린 것일까요? 대표적인 종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탐진치라는 대명제를 제시하면서 중생들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음을 각인시킵니다. 유교의 대부격인 노자의 도덕경에도 덜어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표준인가를 제시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절대 진리를 통하여 인간이 중독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곱씹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손길을 떠나 내 뜻대로의 삶의 행로는 욕망의 안경을 쓰게 되고 타락의 길을 과감하게 걸어가게 됨을 단언합니다. 무엇인가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나약함을 드러내는 진실된 표현입니다.
온전한 길에서 이탈한 존재는
두려움이라는 탈을 쓸 수밖에 없고,
두려움의 탈을 쓴 존재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런 존재는 자신조차 지키기 힘든 나약한 상태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됩니다.
의식의 실종! 이것은 등불 없는 밤길을 걸어가는 위험한 상태입니다. 마치 요즘에 영화로 많이 등장하는 좀비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존재의 지상최고의 수치입니다. 등불이 꺼져버린 길을 걸어가는 존재가 느끼는 것은 두려움에서 전이된 나약함에 의해 전부를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거룩한 소원은 강하고 담대한 존재로 성장해서 자유와 평안 속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지하며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의 옷을 벗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나 존재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거나 붙들고 있는 중독의 세계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문제를 알지 못하면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되돌이표가 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나약한 차원을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중독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지적인 작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찬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겸비한 사람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그릇만이 간곡한 당부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 부모든, 돈이든, 게임이든, 술이든, 담배든,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해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보다 온전한 존재는 없습니다. 이런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하늘이든, 땅이든 모든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현명한 부모에게 여쭤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