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본 사람은 읽어보았을 법한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학교수로 자기 계발의 선두주자인 (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라는 저서입니다. 오랜만에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을 다시 한번 읽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막혔다는 생각을 할 때 가끔씩 찾아보는 저서입니다. 이 책에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라!'라는 대목에 이런 귀귀가 등장합니다. 빈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둘러의 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장 큰 문제와 마주치고,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로부터 인류의 가장 커다란 폐해가 생겨난다" 이것은 인연법으로 주어진 관계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저 이기적인 삶을 지향하는 세상이 맞이하게 될 결말에 대한 해석이 강하게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건대,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나훈아의 노래 "테스형"에 나오는 '세상이 왜 이래?'와 연관지어지는 것은 나만의 관점일까?
모든 성인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말씀의 결론은 '사랑'이다. 하늘의 존재들이지만 땅의 존재들에게 맞추시기 위해 몸소 낮아지신 분들이시다. 그리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는 이 관점을 넘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심으로 실천적 사랑의 본이 되었다. 그리고 유언을 남겼다.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먼저, 내가 사랑을 배워 알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과학적 논리부터 통용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화합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들의 본이 되어야 할 고위공직자들이 추구하는 화합은 기본적 체제부터가 부재상태다. 화합의 기초가 되는 사랑에 대한 의식실종이 그 이유가 된다.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나만 살기 위해 거짓을 발설한다. 더 무서운 병폐는 이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무리들이다. 이것은 우롱하고 있는 자들보고 잘하고 있다고 추앙하는 정말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된다. 사랑의 실천은커녕 오염물을 제공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불성설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른다.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요즘에 재능기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자신의 능력을 도움의 손길로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물질이 풍족하다면 물질을 내어 놓으면 된다. 몸이 건강하면 몸으로 봉사를 해도 되고, 말을 잘하면 목소리로 도움을 자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있는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바라는 것과 추구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제지당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나로 재 탄생하기 위해 내 자아를 죽여가는 것 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만물의 영장인 내가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인들이 보여준 자아의 죽음이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들의 삶 속에 녹아져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인이니깐 그렇게 하는 거지?라는 잘못된 의식이다. 그분들이지난 길을 동행하는 것이 제자요, 친구다. 올바른 관계는 함께 공유하며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유익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확립되어야 가능하다. 이치에 맞아야 물건을 사듯이 말이다. 타인이 있어야 내가 아름다운 보석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개념부터 확립되길 기대한다. 이것이 원천적인 출발이다. '하라, 하라'해서 될 것 같으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겠는가?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의 회복이 우선순위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탄생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요, 사랑의 실천이다. 이제는 인연의 소중함 속에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것은 내가 그렇기 때문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부터 새로운 존재로의 출발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