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배가 고파 갈급함에 젖을 찾아 부르짖는 어린아이와 똑같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족하는 삶에서 벗어나 있다면 변명의 여지없는 어린아이입니다. 그 수준과 차원만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지적 차원에서 졸업하기 위해서는 벗어나기 위해서는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디를 오고 가고,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식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행위의 중요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된 행함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문젯거리로 등장한 단어가 있습니다. '마마보이' 부모에게 빌붙어 독립하지 못한 자녀를 일컫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의지하는 자들도 독립하지 못해 얽매이고 의지하는 습성에 사로잡힌 가녀린 존재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교육의 단계도 등급별로 나뉩니다. 유아원,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 대학, 대학원 등등... 존재의 차원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모두 다 죄인이고, 그래서 모두가 잘못을 뉘우치며 울기에 급급합니다. 아직도 하늘을 만나지 못해서 우는 것입니다. 진정 하늘과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된 존재라면 기뻐 날마다 춤을 추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원래 인간은 독립된 존재였습니다. 스스로 계신 신의 존재와 같은 형상으로 지음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을 떠난 결과 타락한자의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없으면 불안한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은 항상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원래 강하고 담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바 되었다'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나는 스스로 계신 자다"라는 말씀이 최종목적지입니다. 그리고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불교가 지향하는 최종목적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원래 이처럼 위대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존재로의 회귀를 위한 채찍질이 바로 거룩한 사랑입니다. 회귀!!! 지금까지 걸어가던 길에서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실족할 것만 같은 마음에 애를 태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힘든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대동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모진 고통의 환경을 접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세월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회초리라고 합니다.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발판으로 "혈과 육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씀을 품고 내려놓음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불교 수행의 한 방법인 면벽수행도 같은 의미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이런 힘든 여정이 오직 나의 힘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연출자되시는 분의 완벽함이 함께 하시기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점차 최종목적지 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위대하신 분들의 표현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 분들이 친히 가신 길이며, 그 최종목적지는 완전한 독립체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온전해진 증거입니다.종교의 본질은 존재의 완전한 독립입니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 물처럼 흘러가는 삶! 자유와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최종 목적지입니다. 자녀를 낳고 자녀와 함께하고, 자녀를 향한 소원이 무엇일까를 깊이 묵상하면 그 해답은 더욱더 선명해 집니다. 진정한 나,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보다 가치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