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은 대체로 생명체가 생명을 잃어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브컬처에서도 강하게 묘사되고요, 사전적으로는 제도나 법 등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효력을 발생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부활에 대한 신앙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실제적인 수단이 영혼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활은 다시 살아난다. 다시 회복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실제적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믿음 중 하나로, 신약성경의 복음서들(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단순한 기적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신앙인들에게 삶과 믿음의 근본적인 희망과 목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겪고 보게 되지만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충격적인 사건이 기사화되어 나왔을 때 나에게만큼은 저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야~진짜 다행이다."라는 말을 푸념하듯이 뱉어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나 자신에게 안주하고 싶은 존재의 본능에 의지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나 자신이 멍청해 보이고, 미워지고,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생존하게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 모친께 함께 사는 동안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신용을 빌어 대출을 받는 것이었지요. 요즘엔 은행을 방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챗봇과 함께 대출조건을 찾고, 승낙을 받으면 진행이 되는 시대입니다.
모든 절차를 승인받고 대출받은 은행통장으로 2000만 원이 입금이 되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동이체가 몰려 있는 통장으로 입금을 하기 위해 인터넷 뱅킹을 시도할 때였습니다. 평소와 같이 별생각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1000만 원을 계좌이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통장을 확인하니 입금이 되지 않았잖아요.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대출받은 통장을 확인해 보니 돈 1000만 원은 빠져나갔더라고요. 그리고 입금자 확인을 해 보니 다른 사람으로 적혀 있더군요.
멘붕이 따로 있나요? 수십 년을 인터넷뱅킹을 해도 실수 한 번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고민 끝에 받게 된 대출금의 반을 다른 사람의 통장으로 입금을 해 버린 것이죠.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연결된 은행들의 중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무작정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인터넷 정보를 통하여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그 돈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은행에서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강제로 받아낼 방법은 없다고요.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절망이라는 단어가 내 뒤통수를 때리더군요. 삶 속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그중에서도 무작정 기다림은 치를 떨게 합니다. 그 기다 사건 발생일이 금요일이었으니깐, 토 일은 영업일이 아니라 더 깊은 고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모친에게는 당연히 말할 수 없죠. 효도 한 번 하려던 시도였는데 잘못하면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는 꼴이 되었으니깐요. 입맛도 없죠. 무엇보다 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죠? 갑자기 예수의 무덤에서의 삼일과 연계가 되더군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 올까? 그리고 생각난 단어가 부활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내 존재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좌절의 늪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삶이 빈궁한 만큼 돈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더 힘들었던 것은 '이런 네가 살아서 뭐 하냐?'라고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였습니다. 한마디로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4일째 되는 날 오전, 자체반환 할 것이라는 은행으로부터 문자가 들어오더군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내 존재가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환희만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깐요.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거듭남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치욕적인 존재의 치부가 드러나고, 삼일밤낮을 뜬 눈으로 보내면서 내 존재와의 처절한 싸움뒤에 얻게 된 쾌거였습니다. 지금은 그 모진 고통으로 인해 모든 것이 씻겨지고 다시금 새로워진 의식 속에 새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찾아온 사건이 나를 새롭게 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은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습니다.
부활은 우리 죄를 감당하신 예수가 죽어 삼일동안 무덤에 계시다 다시 살아난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완벽한 신의 부활이요, 존재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활도 미칠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 제공하는 선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존재는 거듭남의 연속을 통해 영화로운 하늘을 닮아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