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말씀드립니다. 세상의 부자와 하늘의 부자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세상임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붙들린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돈을 좇아 살아갑니다. 돈이 되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돈이 많은 곳에 사람이 들끓습니다. 돈 잘 쓰는 사람은 받들어 모시고, 돈을 잘 벌어 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요즘엔 주식으로 돈을 잘 벌어 줄 것 같은 단체나 업체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우스운 것은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대가 없이 돈을 벌어 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미끼에 물려서 절망의 처소로 기어들어갑니다. 돈이 없으면 가난뱅이요, 돈이 많으면 부자라는 잘못된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들의 결과물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쓸 줄 모릅니다. 구두새인거죠. 그러나 돈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아픈 사람이나 고통 속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주머니를 틀어버립니다. 이 중에 누가 더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두 번째 사람이 부자라는 것에 한 표를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부자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는 공을 말씀합니다. 없는 것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대신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마음엔 눈에 보이는 현상 그만큼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는 존재의 마음엔 이미 그 마음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예수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자아가 죽어 내 안에 만물의 주관자인 예수만 계시다면 이미 만물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인고의 노력없이 만물의 주관자로 가득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갈급함도 아니요, 열정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의 욕망으로 채워진 것이 어떻게 간구와 기도만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헌신으로 모든 죄는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가 사라졌지 지금까지 지은 업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묵과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그냥 장난으로 들리십니까? 내가 지은 죄는 용서받을지 몰라도 내가 지은 업은 내가 닦아야 합니다.
여기서 혼돈이 올 수 있겠네요. 죄와 업이 뭐가 다른가라는 견해에서 말입니다.
죄는 부모 말씀 안듣고 내 뜻대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업은 내가 쌓은 인연의 모든 것입니다. 내가 집을 나온 것하고 인생은 막 살아온 것 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을 하나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다른데 말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내 안의 본연의 모습인 신의 형상을 회복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가질 것이 넘쳐나고, 탐나고, 채워야 할 것으로 충만하다면 이것은 분명 육신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존재는 채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작은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살아갈까를 생각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겠습니까?
진정한 부자는 내 마음의 성전에 불을 밝혀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은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가난한 존재일 뿐입니다. 전라도를 손에 넣으면 제주도에 마음을 두는 그런 존재, 그리고 결국 죽을 때는 아무것도 써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가는 존재..... 진정 가난한 존재입니다.
만물의 영장은 만물의 영장일 때 만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이 보다 더 큰 부자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절대 부자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