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인생을 마감한 이선균의 유작이 상영되었다.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라는 영화를 끝으로 고인이 되어버린 이선균을 그리며 보게 된 영화다. 그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더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게 여겨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일치하는 영화의 명대사는 우리들의 심령에 새길만큼 크나큰 영향력을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
영화 속에 남긴 대사와 자신이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과 일치함을 깨달았을 때, 무거운 침묵으로 나의 가슴에 가다 온 것은 유독 나만의 감동이 아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책임감을 상실한 이 세상에 고인의 한마디는 영원토록 화자 되어야 하는 내용으로 다가왔다. 자신도 얼마나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 눈물이
현 정권의 안위를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 이 무서운 인간의 욕망은 결국, 선량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정치인들의 비인간적인 면과 마주하게 될 때, 내면에서 끊어 오르는 울분은 현시각에서도 마찬가지 인 듯하다.
탈출이라는 영화 속에서 느끼는 것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존재론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짧은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그저 내 살길만 추구하는 존재의 형태와 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두를 건져내는 희생의 의미가 교차하면서 전재되었다.
존재들의 모든 비극은 내 뜻대로의 삶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지음 바 된 존재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내가 생각한 대로 살아온 마지막은 결국 비참한 나라에 입성하게 된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구적 현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된다.
존재의 위대한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존재의 나약함을 채우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한 결말은 내 뜻대로의 삶을 살다가 무너진 바벨탑과 일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 존재의 위치와 삶의 각도를 체크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는 모든 삶의 현장이 나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대통령 좋은 자리다. 누구나 탐하는 자리가 분명하다. 목사, 스님, 신부 좋은 직분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그들이 함께 모여 우스개 소리를 해 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에 충성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저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만 여겨졌다.
각자의 자리,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등대 삼아 살아가는 존재들의 길잡이가 되면 그만인 것을.... 서로가 다른 길을 가면서, 서로가 다른 의식 세계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진정 인간의 본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도반이라면 지금 자신들이 입고 있는 직분의 옷을 벗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들의 옷은 그대로 걸치고 이러니 저러니 우리는 하나이니 하는 모양새가 참 유치하게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진정 우리가 탈출해야하는 것은 세상의 옷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초월한 양 교만의 자태를 뽐내고 설쳐대는 존재들의 마지막은 초심을 잃은 뒤틀린 바벨탑과 다를 것이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어디 갔으며, 내 마음을 지키라는 말은 어디에 숨겨 놓았는가? 전정 우리가 탈출해야 하는 것은 인기몰이에 빠져 허덕이는 거짓된 실체인 어둠덩어리다. 결국 한 순간에 무너지는 자아의 성을 열심히 쌓고 있는 존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민망하기 그지없기만 하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가 모든 허구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리더들의 다양한 말보다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언제나 탈출을 소원하는 일각의 늪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